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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ks/내 방 여행하는 법

여섯 번째 집: 3동 413호의 그녀, 긍씨

by Mia Dahye Kim 2020. 10. 27.

EN version: https://sheismia.tistory.com/95

 

3동 413호의 그녀, 긍씨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그리고, 쓰는 일을 겸하고 있는 긍정의 ‘긍’씨

1) 기본정보

 

-위치: 경기도 부천시 원종동

행정상의 위치는 부천이지만, 정작 같은 부천 시내로의 이동 시간보다 서울 강서구로 가는 시간이 훨씬 더 짧은 애매하기 짝이 없는 다운타운. 가장 가까운 5호선 화곡역까지는 버스로 약 15~20분 정도가 소요된다. 하지만 교통의 불편함을 제외한다면 지난 3년간 큰소리 한번 난 적이 없을 정도로 조용하고, 시장이나 마트도 비교적 가깝고, 편의점도 걸어서 2분 거리에 2개나 있어서 나는 이 지역을 ‘탕아 같은 지역’이라고 부른다.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가 없는, 그런 곳이거든.

 

-인구: 1명(91년 5월생. 생물학적 여성이며 이성애자. 그림을 전공했으나 글쓰기와 말하기를 더 좋아함. 현재 아버지의 투병기를 유쾌하게 풀어내는 인스타 웹툰을 열심히 준비 중)

 

-면적: 약 18평

 

-언어: 한국어(모국어), 일본어(8년간 일본에서 거주했다)

 

-역사: 근위축성 질환으로 아버지의 투병이 길어지면서, 가족의 삶의 터전이던 도시는 냉정한 황무지로 변모했다. “밖에만 나가면 모든 게 다 돈이야”라는 쓴 푸념과 함께 어머니는 아버지의 간병과 조금 더 여유롭고 느긋한 삶을 위해 귀농을 결정하셨다. 하지만 이 모든 계획에 있어서 단 하나의 걸림돌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나였다. 1남 2녀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나 친인척을 통틀어 유일한 미혼이자, 남들은 잘만 가는 시집도 가지 않고 지금의 삶이 좋다고 잘도 떠들어대는 과년한 서른의 딸내미. 도시에서 이미 일을 하고 있는 나까지 시골로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서울의 말도 안 되는 집값에 이미 수도권 진입은 염두에도 두지 않은 상황. 그렇다고 다른 지역으로 가자니, 아는 이들 하나 없는 곳에 막내딸을 떨궈놓고 가는 것이 부모님 입장에서는 마음이 편치 않았을 터. 그렇게 강제 독립을 위한 거처를 고민하던 와중에, 이제는 대화조차 힘든 아버지가 그나마 덜 굳은 손을 천천히 움직이며 종이 위에 무언가를 써 내려 가셨다. “우리 아파트 앞 동, 평수 작아. 여기보다 전세 저렴해. 찾아봐.” 등잔 밑의 어두움이, 아버지의 지혜로 한 순간에 밝혀진 순간이었다. 그 뒤로 모든 일들이 순조로웠다. 기가 막힌 타이밍에 올 수리를 끝낸 18평짜리 매물이 마침 나와 있는 상태였고, 8년간의 지독하게 치열하고도 가난했던 해외 생활 탓에 제대로 된 기초자금 한 푼조차 없던 나에게 ‘중소기업전세대출’ 이라는 단비를 하늘이 내려 주셨고, 임대인도 협조 적이었다. 그렇게 나는 가족들과 함께 살던 6동 106호에서 걸어서 1분도 채 되지 않는 3동 413호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고, 나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 하신 부모님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한달 뒤 시골로 내려가셨다.

 

-주요 기념일: 나의 생일(5월 13일)

독립 이후에 요리나 베이킹을 즐겨하게 되었는데, 스스로의 생일을 자축하는 의미로 소박하지만 든든한 생일상을 차려 먹었다.

 

-기타 정보: 경비 아저씨들이 수고해주신 덕분에, 단지 내에는 녹음이 항상 푸르르다. 봄이면 색색깔의 꽃들이, 여름에는 푸르른 잎들이, 가을에는 붉은 나무들이, 겨울에는 조금 차갑게 하얘진 나뭇가지들이 출퇴근 길을 즐겁게 해준다. 유일하게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아래층의 강아지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짖어댄다는 것. 주인이 제대로 산책도 시키지 않고 집을 오래 비우는 것으로 알고 있어서, 책임 의식 없이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은 학대라는 나의 지론에 더욱 확신을 주고 있 다. 아, 참고로 그 집, 수도세랑 전기세도 반년 동안 밀려서, 얼마 전에 추심원들이 왔다가는 것을 목격했다.

 

추가: 지금은 코로나 이슈로 인해서 하늘길이 막힌 상태지만 만약 일본이나 중국 출장이 잦은 직업에 종사하고 계신다면, 버스로 10분이면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우리 동네를 적극 추천한다.

 

 

2) 주요 여행지/즐길 거리

 

 

- 책장1: 향수

 

 

자주 뿌리지는 않지만, 마음에 드는 향이나 바틀이 있을 때마다 모으다 보니 작은 컬렉션이 완성되었다. 매니아들의 시선으로 보자면 소박하기 그지없겠지만, 지나간 추억의 디테일을 기억하며 사는 것에 탁월한 재주가 있는 나에게 향수는 회상의 증폭제와도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  책장2: 디즈니의 레전드 애니메이터, 에릭 골드버그의 친필 싸인

 

 

긴 일본 생활을 끝내고 한국에 들어와서 잠시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일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만나게 된 수많은 게스트 중에 가장 기억에 남고 가장 따뜻한 사람으로 추억되는 이들이 바로 에릭 골드버그와 그의 부인, 수잔이다. 긴 세월 속에서 묵묵히 단련해왔을 경이로운 그림 스킬과 훌륭한 인품은 언어나 문화를 뛰어넘은 존경심을 갖게 만들었고, 두 번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들은 나로 하여금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려줬다. 매일 아침마다 침대와 마주 보는 곳에 위치한 에릭의 생동감 넘치는 그림과 메시지를 보면서 다짐한다. “용감한 사람이 되자!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

 

- 책장3: 3대 영양제

 

 

2년 전, 자궁내막증으로 수술을 받았다. 건강이 늘 영원한 나만의 것인 줄 알았는데, 그 오만함은 20대 후반에 양쪽 난소에 7cm짜리 물혹과 5cm짜리 기형종을 얻으며 산산조각 나버렸다. 그 이후로 나의 가장 큰 관심사는 ‘건강’이 되었고, 수술 후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면역력과 체력을 키우기 위해 다양한 정보 수집과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 얻게 된 나의 막강 3대 조합이 바로 이 비타민B, 오메가3, 마그네슘 되시겠다.

 

- 책장4: 스톰트루퍼

 

 

지인에게 정보를 얻어 단돈 19,000원에 들여온 새 식구. ‘갓성비’ 측면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아주 훌륭한 녀석이다. 대략 허벅지 중간까지 오는 사이즈로 늠름한 위용을 자랑하며 홀로 지내는 여인의 방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새로운 보디가드!

 

- 신발장

 

 

원래는 귀여운 인형들이 출퇴근 길을 즐겁게 해줬지만, 안타까운 모종의 이유로 귀염둥이들이 사라지고 남아있는 유이한 장식들. 지금은 투병 중인 아버지의 젊고 건강하던 시절이 자꾸 흐릿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놓은 사진과, 세례를 받은 후(나는 개신교에서 천주교로 개종했다) 나를 무척 예뻐해 주시던 성당 어머님께 선물 받은 성모상. 여담이지만, 성모상을 선물해주신 어머님은 지난 5월 말에 혈액암으로 고통스러운 투병 중에 그토록 섬기시던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셨다. 부디 이제는 고통 없는 곳에서, 세상에 베푸셨던 사랑만큼이나 평화롭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계시기를…

 

- 침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이자,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의 온기로 가득한 장소. 늦둥이 여동생의 혼자살이가 물가에 내놓은 아이의 첨벙질로 보였을 걱정 많은 큰언니가 장만해준 침대와 머리맡 양 옆에는 생일선물로 받은 무드등이 장식되어져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망망대해에 혼자 뚝 떨어진 듯한 느낌이 불현듯 몸을 스치고 지나가며 불안해 질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지금 있는 이 곳이, 나를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이들의 흔적들로 채워 진 공간이라는 걸 자각하게 되는 순간, 다시 한번 힘을 내서 나를 괴롭히는 지독한 고독감을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은 힘을 얻게 된다.

 

- 요리

 

(캬라멜 치즈케이크, 카스텔라, 브라우니, 레어치즈케이크, 브라우니 치즈케이크, 직접 만들어 먹은 셀프 생일상, 김치 수제비, 치킨마요 덮밥 등등)

 

 

 

 

 

 

 

 

 

고해성사를 하나 하자면, 20대의 해외 생활 중에는 정말 야인과도 같은 생활을 했었다. 밥도 편의점 도시락과 인스턴트로 대충, 청소도 대충, 내 멘탈관리도 대충. 서른 살에 다시 한번 독립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시절처럼 나 스스로를 갉아먹고 괴롭히는 삶을 살지는 않으리라, 몇 번이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래서 최대한 건강한 식재료로 건강한 집밥을 만들어 먹고, 당근마켓을 통해 저렴하게 구매한 오븐으로 그 동안 해보고 싶었던 베이킹도 원없이 해보면서 내 몸이 건강해지는 기쁨과 무언가를 만드는 기쁨, 그리고 그것을 다른 누군가와 나눴을 때 얻는 커다란 뿌듯함과 행복을 알게 되었다.